top of page
Dungeon10 - mabinogi_peka
00:0000:00

※자동재생이 되지않을 시 재생버튼 클릭 후 감상 부탁드립니다.

푸른 녹이 슬어있다. 포자로 뒤덮인 나소드팔은 잠식당해 제 의지가 퇴출되었다.

움직이지 않는 신체의 일부를 빛이 사라진 눈으로 내려다본다.

 

죽어가고 있다. 몸을 구성하는 기계들이 죽고, 따라서 호흡이 죽고, 심장이 죽었다. 사람이었던가. 인간이었던가. 레이븐, 혹은 레크리스 피스트라 불리었던 남자는 춥고 눅눅한 지하터널에 버려져 죽은 채 살아있었다. 당연히 죽었어야 할 기관들이 나소드로 대체되어 억지로 생명활동이 지속되고 있다. 나소드에 달라붙은 기생식물이 그를 죽게 놓아두지 않았다.

 

머지않은 과거에 동료가 있었다. 믿고 등을 맡기고, 서로를 지키고, 함께 울며 웃으며 임무를 수행해왔던 숨결들. 있었다. 그 구성원을 더듬더듬 헤아려도 이제는 뇌수 째로 날아가고 없다. 소멸되어 간다​. 유리창에 금이 가듯, 판자가 쪼개지듯 쩌쩌적 갈라져가는 이미지. 뒤틀려 메말라가는 감수성. 그럼에도 흔적밖에 남지 않은 다른 호흡을 찾아낼 수 있다.

 

작고 어릿하면서도 강렬한 붉음.

 

재마저 삼킬 것처럼 너는 타올라 복수심에 속박되어 있던 나를 구원했다. 눈부실 정도로 선명한 웃음으로 나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피로 더럽혀져 있던 나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죄의 낙인과도 같았던 나의 이름을 불러 의미를 바꾸고, 내 품에 너의 머리를 부비며 애절함을 속삭이고, 나는 해 같던 너에게 몸과 마음을 맡겼다. 깊은 해저에 눌어붙은 너의 빛깔이 불꽃이 되어 아직 나를 나로 남아있게 한다. 아, 엘소드. 룬 슬레이어. 너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 물감이 되어있어, 떨어져 가는 와중에도 너로부터 수많은 나를 길어 올릴 수 있다.

 

 

 

 

 

춥다. 잘 느껴지지도 않는 감각으로 멍하니.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것은 의식이다. 마음은 끊어지지 않는다. 썩어 문드러져가는 아픔은 연결고리마다 끼어든 포자가 삐걱이는 나소드에서 오는 것인지, 혹은 이미 생명이라 부르기도 힘든 지경이 된 인간의 부분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관계없다. 너를 기원하는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속한다. 무사히 탈출했을까. 붕괴해버린 입구에 탁해진 눈동자만 움직여 시선을 향한다.

 

 

-안 돼, 형!!!

 

 

부르짖던 애원. 처절하도록. 시리도록 가슴을 에고. 저미던. 비명을 닮은 소리가 칼날이 되어 가슴에 묻혔다. 지금도 피가 되어 강이 되어 흐른다. 레크리스 피스트는 쉰 목소리로 룬 슬레이어를 밀어냈다. 소년에게 더 없는 상처가 될 걸 알면서 잔인하게 자신을 버리라고, 돌이킬 수 없는 강요를 했다.

 

네가 살길 바랐다. 차고 어두운 공간에게 간절하게 소망한다. 이 삶은 한 번 잃어버린 생을 연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 살지 못한다. 저주와 같은 팔을 짊어지기로 한 순간부터 정해져 있는 사실이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부지런히 닳아가는 인간으로서의 레이븐. 깎여나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부속들. 받아들였으되 미처 말할 수 없었던 선고. 너의 꽃 같은 웃음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서.

나는. 레크리스 피스트는.

 

산 채로 부식되어가는 감각 속에서 그리운 소년을 찾아 헤맨다. 자신의 끝을 인지하고, 지금이 최후라고 인식하면서도. 소년이 무사하길 바라고. 무사하다면. 보고 싶다.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싶다. 죽어가는 저를 보면 소년이 웃을 리 없는 걸 알아,

그저 소망하기만 되풀이한다.

 

 

뫼비우스의 띠. 빙글빙글 돌고 돌아 결국은 제 자리로 돌아와 버리는 기묘한 감각.

비틀린 순환의 고리를 따라 느릿느릿하게 몸이 움직인다. 자신의 의지인 듯한, 나소드의 의지인 듯한, 혹은 그마저도 아닌 것의 의지로. 삐걱거리는 소음이 흐른다. 몸 전체에 오염물이 끼어있다. 먹어치울 수 있는 건 모조리 찾아내 게걸스럽게 씹어 취해 놓고도 모자라

제 몸을 탐하는 오물 덩어리. 나소드와 이어진 신경을 따라 녹이 흐른다.

 

통각은 진작부터 기능하고 있지 않아 아프지는 않다. 혈관에 끈끈하게 들러붙은 곰팡이가 꾸물꾸물 체계를 지배한다.

살아있다는 실감은 없는데도 썩어가는 몸뚱어리가 비상벨을 윙윙 울리며 시끄럽게 울부짖는다. 차라리 빨리 편해졌으면 하는데.

자신이었던 구성물들이 미련을 닮은 것에 붙잡혀 늘어진다.

 

 

생각보다 오래 살아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라 되뇌었던 각오가 진흙더미와 같이 질척해진다. 건조하게 말라버린 좁은 세상을 헤매며

날뛴다. 이상하리만치 몸놀림이 가볍다. 텅 비어버린. 오염된 고기.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육이 부패를 멈추고 경질화 한다.

껍질만 남은 형태가 검고 탁한 죽음으로 재구성된다. 떨어져나가는 기억의 파편. 움직일 수 있다. 너에게 갈 수 있어.

눈앞에 피어오르는 붉은 이미지에 눈물이 난다.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픔을. 잡고 싶다.

 

 

 

 

 

닥치는 대로 부수고, 뚫고, 활보한다. 앞조차 보이지 않아 본능대로 검을 휘두른다. 나소드에 기생하던 식물은, 유일하게 남아있던 숙주에 적응해 탄소로 이루어진 부분조차 삼켜버렸다. 거미줄처럼 신체 내부에 짜여진 제 3의 신경계가 숙주를 옭아맨다.

감정을 느끼던 중추, 기억을 관장하던 기관, 생각을 제어하던 뇌엽까지 구석구석 스며들어 입맛대로 조종한다.

행동원리가 바뀐 반나소드는 용이하게 폭주했다.

 

나소드였던 부위로부터 읽어 들인 전투정보는 터널을 부수고도 남을 만큼 강력했다. 깨어진 피부 틈으로 넘실거리는 포자가 흩뿌려진다. 밖으로. 충동이 부글부글 끓는다. 알테라시아는 죽어가던 인간이 품고 있던 얼마 안되는 원(願) 중에 한 가지만을 증폭시켜 효율적으로 다루었다.

 

실제로 살아있어야 할 시간보다 훨씬 긴 고독. 생살이 문드러져 가는, 제정신으로는 버텨낼 수조차 없는 시간 속에서도 사람으로 있을 수 있게 만들었던. 조각조각 떨어져나가 무엇하나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곱씹었던 마음. 나소드를 완전히 먹어버리고, 돌연변이를 일으켜 그릇을 째로 집어 삼킨 뒤로도 삭지 않고 꿈틀거리던 여명. 소년을 보고 싶다는 충동을 모조리 파괴성향으로 돌린다. 터널을 무너뜨릴 기세로 때려 부순다.

 

레크리스 피스트였던 반나소드. 오염된 알테라시아 TYPE-R은 울부짖으며 생전보다 더욱 강한 무위로 제 원을 호소한다. 상황을 판단할 이성은 없었으나 냉철하다. 시각은 유효하지 않으나 유리단면보다 더 예리한 감각이 날서있다. 망가진 듯한 나소드팔은 기긱기긱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섬세하고, 한 번 휘두르면 너덜너덜하게 나가떨어질 듯한 육체는 거칠게 파괴와 수복을 반복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텅 빈 의지를 구성하는 인자는 격렬하게 휘몰아쳐 몰아세운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상실하고, 빛바랜 과거의 잔향만을 그리워하며 좇는 위태한 검무. 베어도 베어도, 파괴하고 으깨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공허. 채워지지 않는 충동 그 자체가 아프다. 무엇을 찾고 있던가.

 

 

 

 

 

 

검신 너머로 전해지는 떨림은 굉장히 오랜만의 실감이었다. 살점이 푹 찢기며 떨어져나가는 감촉. 나소드핸드를 적시는 뜨뜻한 체온에 겨우 무언가를 잡은 기분이 들어 환희한다. 기쁨에 소리 없이 떠는 괴물의 양 뺨이 고사리처럼 여린 손에 잡힌다. 팔을 째로 베어내려던 움직임이 멈춘다. 익숙한 품. 뭔가가. 오랜 시간 잠겨 있던. 꿈틀대는 본능. 뺨을 더듬던 어린 손이 위로 올라간다. 찌찍 소리와 함께 눈을 가리던 구속구가 뜯겨나간다. 시력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암흑에 갇혀 있던 세상이 열린다.

 

눈이 부시다. 환상을 본다. 앞이 보인다면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얼굴이 마른 안구에 비친다. 홍염과 같은 붉은 룬. 양 어깨로 흘러내린 붉은 색채. 머리카락과 끈적한 혈액. 언뜻 텅 비어버린 듯한, 그러나 격렬한 감정이 맥동하는 눈동자. 처음 보는 눈에 덜컥 심장이 정지한다. 아니다. 이 몸은 멋대로 정지해주지 않는다. 그런 착각을 해버릴 만큼 놀라고 있었다. 동력원에 불과하던 불길이 타오른다. 잃어서는 안될. 마지막까지 결코 놓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 눈앞에.

 

“……엘…소드?”

 

툭, 맥없이 떨어지는 검. 목적을 잃은 팔이 어찌할 줄 모르고 헤매다가 너를 붙잡는다. 허벅지가 깊게 패어 있다. 어깨가 삐뚜름히 썰려있다. 검붉은 절망이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콸콸 흘러넘친다. 너는 웃는다. 예쁘게 한숨짓고, 목덜미를 끌어안고, 쭉정이처럼 텅 빈 자신을 따뜻하게 만들며 속삭인다.

 

-다행이다, 역시 내 형이잖아.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없다. 왜.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하고 탁한 홍채에 너를 담는다. 의문이 메아리친다. 폭발하는 감정에 짓눌려 움직일 수 없다. 저로부터 뚝뚝 떨어지는 녹물이 붉은 소년을 더럽힌다. 안 돼. 변형을 마친 알테라시아 포자는 나소드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숙주로 삼는다. 너까지 이렇게 될 필요는 없잖아. 무의식적으로 털어주려 팔을 들지만, 너에게 손끝하나 닿아선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네가. 눈앞에 있는데.

 

자해하려는 나소드팔을 신체로부터 뻗어 나온 줄기들이 얽어 막는다. 몸부림치며 인간이 아닌 언어로 절규한다. 사고할 수 없는데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깨닫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런 자신을 소년이 막아주고, 그 대가를 다시 소년이 짊어진다. 풍화되어버린 마음이 눈물을 흘린다. 울 수 없게 되어버린 육이 그저 아프다. 제 것이 아닌 생이. 생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의지가. 지상에 붙잡혀버린 혼만이 아우성친다.

소년, 룬 슬레이어는 그 모든 걸 읽는다.

존재하는 형태가 바뀌어도, 살아가는 원리가 바뀌어도, 그 안에 있는 건 제 전부를 바쳐 사랑한 형이다.

살아있을 리 없다고 모두가 말렸다. 세상을 위해서는 눈앞에 날뛰는 기생식물을 죽여야 하는 걸 안다. 하지만 이건 내 형이잖아.

나를 다치게 한 걸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녹색 피고름이 흐르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본다.

탈출구가 묵직한 울림과 함께 무너져 막힌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면. 두 번 다시 놓지 않을 거야. 소년의 피와 알테라시아 녹물이

뒤섞여 바닥에 스며든다.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서질 듯 약해진 연인을 끌어안았다.

12.Labyrinth VI - The Vengeful God in the Dark Ocean Abyss ~ Unrest - Calling That Detestable Name - 세계수의 미궁 3 Arranged OST
00:0000:00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