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Apocalypse
트위터 ID : @moonriver_k 월하.
내리쬐는 햇살과 다소 짜증 섞인 신음이 아침을 맞이했다. 거칠고 매서운 샌더 특유의 모래바람은 열린 창문을 통해 마을 여관에 묶던 연구자의 안면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분명 밤에 창문을 걸어 잠그고 잤을 터인데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휘몰아치듯 침입한 모래바람은 다이너모로 구현한 자명종소리보다 효과적이었다. 사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서둘러 창문을 닫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었다. 밤새 열려있었던 것일까,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 사이로 모래가 한 움큼씩 쏟아져 나왔다. 모래 속에서 잤다고 작게 투덜거린 마스터마인드는 정갈하게 머리를 묶었다. 300년 뒤의 시공에 떨어져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기술들인데 어째서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 하는지, 거울 속의 사내는 불만에 차 보였다. 하피들과 트락들을 처리하는 것은 성가신 일이었다. 그럼에도 처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칼루소 부족들은 힘에서 밀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다이너모의 공격력을 개선시켜서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들도 마족을 처리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일까, 도무지 베히모스의 심장부에서는 진전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여관에서 마을 주민들끼리 수군대는 소리와 혀 차는 소리가 자존심에 대창처럼 꽂혔다.
“저 남자 또 가는 거야? 지독하다, 지독해.”
“저러다 또 마을사람들만 위험해지겠군. 다른 곳도 아니고 몬스터들의 소굴 중심부에서 쓰러져버리면 구조하기도 어려운데......”
이번에도 실패인가. 오늘도 베히모스를 장악한 마족의 얼굴은 보지 못 했다. 더 강력한 것, 이제껏 만들어내지 못한 기술이 필요했다. 더 나아간다면 저번처럼 뻗어버리고 말 것이란 계산 결과가 스크린에 떠 있었다. 이 이상의 진행은 아둔한 발악이다. 사내는 평소보다 일찍 여관으로 돌아왔고, 이 날만큼은 마을사람들도 더 이상 그에 대해 수군거리지 않았다.
꼬박 5일을 마을 외곽으로 다녀온 사내의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5일 동안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던 사내는 떠날 때보다 야위어 있었고, 머리카락 또한 푸석푸석했다. 모래바람과 먼지, 몬스터의 잔해쯤으로 보이는 핏자국들이 엉겨 붙은 전신에서는 사람들이 고개를 돌릴 만큼 강한 악취가 풍겼다. 여관 주인은 말없이 목욕물을 준비해주었고 목욕을 마친 그는 식사도 하지 않은 체 잠들었다. 굳게 걸어 잠근 창문 아래에는 지난 5일간 그가 악착같이 모은 것들이 담긴 묵직한 천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제대로 먹은 것이 없을 거라 여긴 여관주인은 소화가 잘 되고 위장에 무리가 되지 않는 음식을 준비해 사내의 방문을 두드렸다.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을 만드는 남자였지만 어찌되었든 그 덕분에 몬스터들의 침입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는 연구목적으로 잠시 묶어간다고 말했을 뿐 무엇을 연구하는지,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함구하였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으나 여관 주인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며 매번 고개를 추켜드는 의심을 외면했다.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그 남자 덕분에 마을이 평온해진 것은 사실이었고 별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으니 손해날 것이 없다 생각한 것은 여관주인의 긍정적인 성격과 매사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이 이로운 그의 직업 탓일 것이다. 경쾌한 노크소리에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주인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심호흡을 하며 식사를 가져왔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책상 앞에 앉아 무수히 많이 띄워진 스크린들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어린 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집착이었다. 사내가 무어라 웅얼거리는 것을 주인은 가까스로 알아들었다.
“드디어, 드디어 완성했다!”
그 난리를 쳐서 이룬 결과가 겨우 이 정도인 것인가? 사내는 스스로의 발명에 뿌듯하면서도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에 또 다시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연이은 테스트에서 새로운 기술은 기대했던 것만큼 자율적이고 지능적으로 구현되지 못 했다. 명중률은 자신이 직접 조준하는 팬저 버스터에도 못 미쳤으며 시전자를 따라 움직여야 할 타이밍에도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는 등, 전투상황에 유동적으로 대처하지 못 했다. 공격력 상승은 어디까지나 명중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어떻게든 자신을 따라 이동하고 주변의 적을 정확하게 섬멸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지난 며칠간 쏟아 부었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다. 명중률, 명중률을 높여야 했다. 씻고 나오니 여관주인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라면 아래층에 가서 해도 된다만.”
이맛살을 찌푸릴 법도 한데 여관주인은 서글서글 웃으며 오늘은 모래바람도 불지 않고 간만에 날씨가 화창하니 조금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식사를 내민다.
“쓸데없는 참견이로군.”
차갑게 쏘아붙이는 것에 기분이 나빠서라도 돌아갈 거라 생각한 것은 오만이었다. 여관 주인은 호주머니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사내의 얼굴을 비추었다. 거울 안에는 눈 주변이 검은, 죽은 송장이 걸어 다닌다고 말해도 믿을 법한 몰골의 남자가 피곤한 시선으로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밥 먹고 외출을 하라고, 여관에서 초상 치면 장사 책임질 거냐고 묻는 여관 주인의 목소리는 염려스러움이 가득했다.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 싫다고 생각한 사내는 주인의 의견에 수긍하였다. 효율이 떨어지는 것을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빠르게 빈 그릇을 건네고 마을의 연금술사 집으로 향했다.
모래바람이 거칠어도 제법 활기찬 마을이었다. 평소에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편인데 모래바람 한 번 잠잠해졌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온 모양이다. 길거리에는 장사꾼들이 먹을 것을 팔고 원단을 보여주며 흥정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만의 숨바꼭질을 하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술래가 벽을 마주보고 서 숫자를 큰 소리로 외치자 오빠로 보이는 한 아이가 여동생의 팔을 잡아 끌어 시장의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 켠이 아려온 사내는 잠시 옆으로 비켜서서 분주한 모습들을 망막에 담았다. 시장에 간 기억은 없었지만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모종 값을 흥정하던 중 벌어진 에피소드들과 키우던 식물들을 일부 처리하면서 생겼던 실랑이들. 어머니께서는 그런 얘기들을 재미있는 동화처럼 들려주셨고 무릎을 베고 누운 자신은 그 이야기들에 천진하게 웃었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작별을 고하자 친구들과 뛰어 놀던 남자 아이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제 어머니께 달려가는 모습을 끝으로 사내는 상념을 그만두었다.
연금술사는 폐점 시간에 오면 어쩌냐고 잔뜩 투덜거렸다. 귀찮은 녀석이라며 늦게까지 일을 시키는 대신 값을 더 지불하라는 요구에 잠시 생각에 잠긴 사내는 내일 찾으러 오면 되지 않냐고 물었다. 연금술사는 안경 너머로 사내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깊게 한숨을 쉬고는 양이 많아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니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했다. 원래 이렇게 친절했던 할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웬일로 차와 의자를 내어줬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유심히 바라보니 차 한 잔을 느릿하게 비워낸 그녀가 말을 꺼냈다.
“고민이 있는 모양이구먼.”
눈매가 매섭게 올라가는 사내를 연금술사는 귀엽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의외로 해결책은 등잔 밑에 있는 법이지. 너무 멀리 보지도, 가까이 보지도 말게. 젊은 친구가 그러다가 나보다 일찍 저 세상으로 가겠구먼. 건강은 젊을 때 챙겨야 돼.”
짧은 잔소리를 끝으로 연금술사는 만들어달라던 음식들을 모두 건네주었다. 값을 치르며 추가수당을 물어보니 시계를 쳐다본 그녀는 정확하게 폐점시간이라며 추가수당은 필요 없다고 했다. 가게 밖으로 나서는 그를 이상하리만치 유심히 쳐다보는 그녀가 이상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아는 척해주기에는 너무 피곤하여 저절로 발걸음이 여관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던 사내는 빈 속에 곡기가 한꺼번에 들어가서 그런지 아침부터 느껴지던 메스꺼움에 눈을 감아버렸다. 해결책은 등잔 밑에 있다. 방 천정에 달린 소박한 등이 어둑해진 하늘 덕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저놈의 창문은 제대로 닫히질 않는 것인지 모래 냄새를 가득 실은 바람이 전등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벽면에 일렁이는 가구의 그림자들 사이로 낮에 봤던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동생을 잡아 끌던 손이 어머니께서 내밀어주시던 다정한 손과 겹쳐졌다.
“그 도서관 안으로 어머니도 끌어당겼으면 좋았을 텐데.”
자조적으로 말한 것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다시 한 번 그림자를 외면하려던 사내는 불현듯 벌떡 일어났다. 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 다이너모를 불러 스크린을 띄운 사내의 방에는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지나온 발자취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더 이상 하피들을 처리하기 위해 매번 발사 각도를 조절할 필요가 없어졌다. 높은 명중률이 상향된 공격력과 만나 빚어낸 시너지 효과는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자랑했다. 타격 대상을 흡입하고, 유도기를 장착한 신기술은 프로토타입 때와는 다른 성능을 발휘했는데 자동 조준 기술을 삽입하자 팬저 버스터를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몬스터를 처리하는 시간이 빨라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처 죽이지 못한 잔챙이들이 남는 것이 화근이었다. 더불어 숨 좀 돌리기 위해 그리고 비교적 자신이 덜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치고는 지속시간이 너무 짧았다. 1분도 채 못 채우고 사라져버리니 이건 에너지만 축내는 기술에 가까웠다. 한 끝이, 부족했다. 샌더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숨겨진 비밀통로. 그곳에는 표면에 드러난 것보다 짙은 음모가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제정신이 아닌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선 보다 긴 지속시간과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현재의 기술로서는 제 수명이 다하면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것이 전부.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지 않기 위해 지속시간을 제한한 것은 큰 실수였다. 포션을 복용하거나 다이너모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1분 남짓. 즉, 최소 1분 이상은 버텨주면서 근처에 오는 적을 모두 섬멸하고, 혹시라도 1분 내에 다이너모가 상태 회복을 못 하거나 자신이 미처 준비가 안 됐을 경우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한 방이 필요했다.
“수명시간을 제어하는 공식 수정, 사라질 때의 폭발력과 타격횟수 증가. 두 가지를 해결하려면 소환할 때 사용한 에너지를 대상이 그대로 흡수하여 에너지 효율을 높여야 한다. 폭발력과 타격횟수는 뒷부분의 코드를 약간 수정해야겠군. 그러나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1분간 쉴 새 없이 공격을 유지하면서도 마지막에 충분한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강한 폭발력과 충분한 타격횟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의 양이다. 다이너모, 계산을.”
계산 결과 기존에 사용하던 것들보다 많은 자원 소모를 요구했다. 물론, 평상시라면 위험하지 않겠지만 해당 기술은 이전보다 강한 몬스터에게 사용될 것. 공격력과 명중률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경우 자칫하다간 목만 날아갈 것이다. 기본적으로 다이너모는 엘 에너지를 이용하여 기동하며 고안한 기술들 또한 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들이 많았다. 이번 신기술 또한 그런 류인데 일부는 다이너모의 에너지를 쓰되 나머지를 외부에서 충당한다면 요구 조건을 만족하는 기술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실마리를 따라간 곳은 다시 한 번 연금술사의 집이었다. 저번에 만들어달라던 양이 제법 컸던 탓일까,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는 연금술사에게 사내는 전혀 다른 것을 물었다.
“엘 에너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말꼬리가 짧다며 혀를 차대는 걸 깔끔하게 무시한 체 대답을 재촉하는 사내에게 연금술사는 엘의 조각을 분해하면 엘의 힘이 응축된 보석을 얻을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이 조각들 전부 분해해줄 수 있나?”
연금술사는 그러면 그렇지, 갈수록 귀찮은 일거리들만 의뢰한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반나절을 소모하여 사내는 충분한 양의 엘의 정수를 얻을 수 있었다.
여관방으로 돌아온 사내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근래 들어 방에서 통 나오질 않았다. 무언가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여관 주인은 특히나 그의 방 주변이 시끄럽지 않게 관리하며 제일 구석진 방을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 안에서는 다이너모가 분주하게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고 있었고 모든 것을 감독하는 관리자는 기계만으로는 부족한 듯 조바심이 난 표정으로 손수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수학적으로 검증하고 있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세운 가설들을 차례차례 지워나가던 사내는 점점 그가 찾는 해답에 가까워져 갔다. 비록 그것이 지속적인 ED 소모를 부를지라도 더 강해질 수 있다면, 그래서 더 수월해 질 수 있다면, 그래서 어머니께서 나소드 공학자로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다면. 오로지 그 생각을 하며 사내는 다시금 밤샘에 돌입했다.
익숙한 기계음이 가득 찬 귓바퀴에 규칙적인 신호음이 잡혔다. 며칠 간의 연산 끝에 엘의 정수 1개와 전투 중 사용할 수 있는 다이너모에 내장된 최대 에너지를 사용하여 1분 동안 신기술을 유지할 수 있는 코드를 완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누수 되던 에너지를 흡수하여 지속시간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공격력을 상승시켰으며, 메모리를 압축하여 대상을 소환한 후에도 다이너모는 개별적으로 전투를 계속 할 수 있게 개조했다. 더불어 대상이 뇌파를 추적해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코드를 추가하여 제 곁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고 주변으로 몰려드는 적들을 섬멸할 수 있게 수정했다. 남은 것은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멀리서 폭주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족에게 오염되어 제정신이 아닌 것을 섬멸하고 모래바람에서 벗어날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몬스터를 마주하기 전에 사내는 지난 세월을 잠시 돌아보았다. 엘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고대 설계도를 연구한 것과 인공지능을 위해 알테라를 이 잡듯이 뒤졌던 시절. 그리고 마침내 완성한 궁극의 기술을. 추억에 빠진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베히모스가 사내를 노려보며 포효한다. 주인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모인 6개의 수족에게 사내는 짧게 명령했다.
“Good day to die.”
묵시록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