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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등을 덮었다. 더 이상 머리띠로 고정할 수 있는 길이가 아니라, 머리끈을 쓰기로 했다. 숱 많은 머리카락을

올려 묶고 나니 거울 속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표정없는 서늘한 눈. 체모. 피부까지. 외형은 그레이스를 닮았다.

길게 숨을 뱉자, 거울에 습기가 찼다.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자, 자연 진화로 얻을 수 없는 안구가 보인다. 그녀를 닮은 것은

외형 까지다. 내부는. 아마도. 에스커의 유산.


나쁜 일은 아니다.


스타일을 바꾼 김에 며칠전 퐁고족을 부려 제작한 코트로 갈아입었다. 예전 옷은 소매에 튄 용액이 착색된 탓에 버리기로 했다. 기장이 짧아진 바자도 두어벌. 파손된 도구와 시약병. 날을 너무 갈아 뭉툭해진 공구와 충전시간보다 방전시간이

더 긴 배터리도 버리고. 나니. 이것 참 필요도 없는 청소를 하고 있다.


지독한 정리벽에 정리할 것은 많지 않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많다. 짊어진 짐의 무게와 부피를 최소한으로 줄이다보니. 남은 것은 며칠 먹을 건량과 식수. 그리고 자료를 저장한 디스켓. 속옷과 셔츠가 다다. 아. 세면도구는 반드시 챙겨야 하고. 어차피 연구자료는 전부 디스켓 내부에 문서화 시킨 후, 저장해뒀다. 하루가 멀다하고 떠돌아 다니는 여정에 종이책이라는 사치를 부리긴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알테라 마을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던가.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자, 감회가 새롭다. 어차피 여기서 오래 버티지 못한 거라는 건. 협력을 약속했던 이가 무능력하고 멍청한. 합리적이지 못한 머저리라고 알아차린 순간부터, 짐작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말이지. 이런걸 숨기고 있었다니. 제법이잖아. 영주.


이제는 듣지 못할 귀가 되어버린 이에게 중얼거리며 모니터에 비치는 그녀를 바라본다. 저 메커니즘. 상황판단 능력.

그리고 추측컨데 앞으로 수백년은 더 쓸 수 있을, 압도적인 내장 배터리. 저 것은 내 것이다. 들끓는 연구자의 탐구심을

가라앉히고. 에드는 몸을 돌려, 무너지기 시작한 알테라 코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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