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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머니. 오랜만이네요. 제가……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난 게 언제였죠? 이제 와서 시간을 따지는 것도 우습네요.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오직 시간만큼은 절대적이라는 걸. 그래서 요즘은 시계의 초침소리도 시끄러워서 죽고 싶어요. 아니. 

그보다 죽이고 싶어요. 죽고 싶은 것보다 죽이고 싶은 게 많아졌거든요. 시계뿐만 아니라 날마다 미워지는 것들이 많아져가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것들이 싫어지더라고요.

 

이곳에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다양한 일을 겪었죠. 어머니가 남긴 좌표로 돌아가기 위해 연구도 많이 했고요. 

어머니에게 떳떳한 아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매일매일 어머니가 그리웠죠. 하루 빨리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내가 있어야할 곳은 어머니의 곁이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번번이 실패하더군요. 아무리 과거로 되돌아간다 해도 

그곳엔 또 다른 애드가 어머니의 곁에서 웃고 있는 거예요.

 

불행하지 않은 에드워드를 본 순간, 솔직히 화가 치밀었어요. 어째서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처음엔 저의 지식이 부족한 줄 알았어요. 고대 나소드 지식이 쌓인 도서관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시공간 이동 연구의 완벽한 좌표. 

아무리 계산을 하고 새로운 식을 세워 대입해도 오차율은 줄어들지 않았고요. 거긴 내 자리일 텐데. 어째서 또 다른 에드워드 그레노어는 나처럼 불행해지지도 않은 채 어머니의 곁에 있는 거지?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았을 텐데. 내가 돌아가야 할 과거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생각해봤죠. 제가 거슬러온 세월을 뛰어넘고도 남을 방대한 에너지가 있다면 이 실패를 

조금이라도 고쳐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신이 만들었다던 거대 엘에서 빼돌린 에너지로도 어머니가 계신 과거로 돌아갈 순 없더군요. 하하. 신의 힘을 써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니. 정말 신조차 저를 버린 걸까요? 신이 뭐길래…….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날 버린 거지?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거대 엘을 실제로 본 적은 없으시겠죠? 네, 맞아요.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만들었다던 생명의 보석. 그건 정말이지, 

나소드 동력원에 쓰이는 자그만 엘의 조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찬란했어요. 따스하고, 황홀하고,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빛이었어요. 

어머니의 온실처럼요. 그리고 헛웃음이 나더군요. 고작 저런 보석이 부서졌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했다니. 신의 힘으로도 

나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니. 나는 이제 무엇을 믿어야 하죠? 노예 시장에서 도망친 이후론 신을 믿지 않기로 했을 텐데. 

신조차 나를 버렸다면 내게 남은 건 무엇인가요? 나는 앞으로도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하나요?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당신을?

 

날 미래로 보내려 했던 어머니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게 후회스러워요. 아니, 그날 어머니와 함께 죽지 못한 게 아쉬워요. 

그때 그냥 같이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사는 게 고통스러울 줄 알았다면 그냥 죽어버릴 걸 그랬어요. 왜 저를 살게 했나요? 왜……. 

그때 저를 사랑해준 거죠? 절 사랑해준 게 맞는 거죠? 어머니. 당신의 사랑 때문에 내가 이렇게나마 살게 된 거라면……. 

어머니. 다시 물을게요. 당신은 정녕 날 사랑했나요? 진심으로 사랑해주긴 했나요? 날 사랑했기에 이 괴로운 삶을 이어나가도록 

살려둔 것인가요? 내가 이렇게 망가진 이유가 당신을 향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걸 알아요. 그렇다면 차라리 같이 죽어버리게 해줬어야죠. 

날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 자리에서 같이 죽게 해줬어야죠. 삶이란 게 이렇게 괴로운 거라면 당신과 함께 죽어버리는 게 좋았어요.

 

이제야 깨달았어요. 애초에 어머니에게 돌아가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다는 걸. 당신은 이미 내게 없는 존재나 다름없으니까. 

당신의 곁에 있어야할 에드워드 그레노어는 죽은 지 오래니까. 내가, 죽였으니까. 당신의 곁에 머물러야할 에드워드 그레노어는 당신이 

내게 애드라는 이름을 준 순간부터 죽어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에드워드 그레노어는 나약했으니까. 나약해서, 당신이 죽은 것도. 

내가 노예가 되었던 것도, 모두 에드워드가 나약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애드는 나약하지 않아요. 당신이 사랑했기 때문에 

머나먼 미래로 보내버린 나는 나약하지 않아. 이젠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졌어. 매일 밤, 당신의 미소를 잊고, 

울음을 삼키며 내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당신의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게 되었지.

 

어머니. 당신의 다정함은 날 병들게 했어요. 더 이상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면 내가 망가지고 말겠죠. 돌아가지도 못할 과거를 바라보며 

절망에 빠지고 무의미한 저항을 반복하고, 결국 처참하게 실패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레이스……. 당신이야말로 나의 실패예요. 

당신을 붙잡고, 놓지 못하면 나는 끝없이 절망으로 빠질 테니까.

 

기억하고 있나요? 아주 어린 시절에 당신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었죠. 누구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요. 날 사랑했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말한 걸 알아요. 내가 행복하지 않게 살까봐 불안해 하셨던 것도 

알아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것 좀 봐요. 모두 당신의 뜻대로 됐어요, 그레이스. 나는 지금 행복해요. 이곳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이상향이라고요. 어떤 아픔도 슬픔도 그리움도 없는 이상적인 세계. 언제든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세계. 그리고 언제든지 당신을 잊어버릴 수 있는 

완벽한 세계. 세상이 완벽해질 수 없다면 내가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면 되는 일인데. 나는 왜 실패한 과거로만 돌아가려고 했을까? 

당신 때문에? 역시, 내가 당신을 그리워했기 때문인가?

 

난 아직도 나소드가 너무나도 증오스러워요. 내 삶이 이딴 고철덩어리들 때문에 망가진 것이 끔찍했고, 이렇게밖에 살지 못한다는 게 

끔찍하지만, 날 사랑했던 당신보다 내가 혐오했던 나소드만이 내 곁에 끝까지 남아있었죠. 당신이 준 사랑도 결국 가냘픈 무언가에 

불과했던 거예요. 증오만이 오래도록 곁에 머무는 기분을 알고 있나요? 과거마저 잊어버린 내게 남은 것이 이딴 고철덩어리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절망을 알고 있나요? 모르겠죠. 어머니. 당신은 날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요? 

만약 당신을 사랑한다면 날 버리고 떠난 당신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건가요?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머니. 나는 이제 당신이 그립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아요. 상냥함을 잃은 당신은 

내겐 그저 내가 잊어야할 부끄러운 과거에 불과해요. 나는 당신을 잊고 또 잃어버렸고, 앞으로도 영원히 잃어버리겠죠. 그레이스라는 

이름마저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신의 힘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면……. 애초에 소멸해버린 과거는 내게 필요 없지. 신마저 날 버렸다면, 

내가 신이 되겠어. 아무도 날 구원하지 않겠다면 내가 날 구원하면 돼.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내가 만들어내면 그만이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내가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빌어먹을 나소드로. 끝까지 내 곁에 남아있었던 기계로. 

내가 한때 사랑했던 것들과 오래도록 잃어버린 것들을 창조해나가면 되는 거야. 따스했던 어머니의 온실도. 어머니의 다정한 미소도. 

고통뿐이었던 아버지의 연구실마저.

 

……녹음을 삭제해, 다이너모. 그리고 지금까지 연구한 시공간 이동에 관한 자료들을 모조리 폐기한다. 내가 원했던 세계는 여기 있으니까. 

세상이 완벽해질 수 없다면, 내가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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